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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칼럼 :: "바람이 분다"
   
▲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하종원 교수

 #1. 가을이다. 오래된 일상이지만 계절의 변화는 여전히 신비하고 경이스럽다. 그 조짐은 바람으로부터 나타난다. 눅눅하고 후더운 여름의 열풍과는 달리, 몸을 감싸는 선선하고 기분 좋은 갈바람으로 가을은 시작된다. 그리고 점차 쌀쌀하고 스산한 냉기를 머금으며 가을은 깊어간다. 중학교 시절의 어느 늦가을, 학교를 파하고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밤바람에 울컥 가슴이 먹먹해 진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바람결에 내 안에 숨어 있던 무언가를 문득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바람은 그렇게 색깔과 냄새, 촉감으로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감을 알려주며 새삼 우리 자신을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2.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뜻한다는 이 구절은 우리나라의 여러 시인들에 의해서도 차용되었다. 오규원은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순례의 서>)라고 인용하였고, 남진우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라고 토를 달았다. 대학 시절 처음 접한 이 시구를 구호처럼 암송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 짧고 단순한 글귀의 의미를 절절하게 느꼈던 것은 그로부터 한 참 뒤이다. 마감시한을 코앞에 둔 박사논문이 난항을 거듭하고 그만 내려놓을까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까지 들던 그 해 가을, 학교로 가던 중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 문득 이 구절이 떠올랐다. 순간 그동안 입에서만 머물렀던 이 단어들이 마음을 강하게 때렸다. 이날의 깨달음으로 학위를 마무리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헝클린 마음을 다잡은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3. 이미 자의반 타의반 두 차례의 은퇴선언을 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번엔 진짜야!’라고 외치며 만든 마지막 은퇴작이 <바람이 분다>(The Wind Rises, 2013)이다. 일본의 전투기 제로센을 설계한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였기에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2차 세계대전 발발을 미화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정작 일본의 극우파들이 반일(反日)적이라고 혹평하였듯이 이 작품의 초점은 군국주의 찬양이 아니라 대지진과 대공황, 태평양전쟁이라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간 한 인간에 있다. 근시인 탓에 조종사를 포기하고 설계자의 꿈을 실현해나가려 했던 주인공은 실패를 거듭하고 아내마저 병으로 보내야 했던 혹독한 현실에서도 굴하지 않고 굳굳하게 나아간다.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전투기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무거운 멍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고독과 좌절 속에서도 그가 추구했던 것은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묵묵히 걸었던 자신의 길 그 자체이다. “바람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바람이 지나감을 알 수 있다”는 프롤로그의 대사처럼 그는 바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마음을 다지며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4. 2011년 등장한 <나는 가수다>는 대중음악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프로그램으로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재해석되어 소개되었던 수많은 노래 중에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있다. 가수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몇 차례 재녹음을 했다는 이 노래는 “사랑은 비극이여라”는 구절이 말해주듯 잃어버린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상처와 아픔의 지점을 넘어선다. 처절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살아야만 하는 삶의 허무와 극복을 말한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지만 그래도 결국 다시 살아간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지만 외로움은 여전히 존재한다. 아마도 그것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절대고독’일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의 말씀처럼 ‘홀로서기’의 미학을 배워야 할런지도 모른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 유지태는 애달팠던 사랑을 보내고 바람 부는 보리밭에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참으로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그 장면처럼 사랑은 가도 삶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5. 가을이 저물어간다. 지금껏 많은 가을을 맞았고 또 보냈다. 그러나 그 가을은 똑같지 않다. 올 가을은 작년과 다르며 또 내년과 다르리라. 아니 가을은 늘 같았지만 정작 달라진 것은 나 자신일지 모른다. 중학시절 가을과, 대학시절 가을과, 사회에 나와서의 가을과, 그리고 올 가을의 나는 다르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나 자신도 변해간다. 이 가을, 무엇을 해야 할까. 바람 부는 언덕이나 들판에 나가봐야겠다. 그리고 ‘어찌 잘 살고 있냐’는, 바람이 던지는 안부에 답장을 해야겠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생각해봐야겠다. 내 텅 빈 마음에 바람이 분다.

하종원 교수  won@sunmo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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