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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수의 세상읽기 :: 아름다운 한 장의 사진
  • 최영수 칼럼니스트
  • 승인 2014.08.0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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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한 장의 사진 속엔 수많은 비밀이 숨어 있다. 혹시 TV속 프로그램에서 새들이 앉아있는 사진을 보고 전문적인 조류학자가 이 새들은 인위적으로 자세를 일부러 잡아 사진을 찍었다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들이 최근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인터넷 기사와 뉴스로 잠시 떠올랐다. 사건은 이 아름다운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한 '노력'은 무엇인가?

어느 한 마을에서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기 위해 각도가 잡히지 않는다며 마을주민들을 고용해 오래된 노송나무 고목을 베는 일이 발생했다. 무려 사진을 찍기 위해 나무를 베어 환경을 훼손한 사건이었다. 평균적으로 그런 아름다운 사진의 보이지 않는 뒤편에 나무들이 베어져 있는 끔찍한 상황인 것이다. 다른 사건으로는 새 둥지의 사진을 찍은 것인데 둥지를 더욱 잘 찍기 위해 둥지 주변의 엄폐물들을 제거하여 둥지에 있는 새끼들의 다른 상위 포식자들에게 노출 되게끔 만든 후 사진을 찍고 방치를 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꽃이나 다른 식물들의 사진을 찍은 뒤 사진작가들은 자신들이 찍은 그 아름다운 사진의 실체를 자신의 손으로 훼손하고 짓 밟아버렸다. 이유인 즉, 다른 사진작가들이 그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과연 이런 자연을 훼손하고 더러운 편법을 쓴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과연 ‘아름다운 사진’인 것일까? 이러한 사진작가들의 실태에 일부 사람들은 경악하기도 했으며 '순수'하다고 생각될 예술의 한 분야에서 사진작가들은 그들의 더러운 실태를 숨기고 있다. 만약, 예술이 결과에만 치중되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예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예술이나 순수한 문학이 될 수 없다. 아름다운 한 장의 사진이 나오기 위해선 그 결과에 걸 맞는 과정이 있어야한다. 궁극적인 목적이 최고의 사진일지언정 그 결과를 나타내어주는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일종의 모순이다. 아름다움을 위해 추함을 나타내는 작가들의 ‘모순’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사진만이 아닌 다른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과거 러시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소트니코바의 결과는 정말로 '아름다운' 결과였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각종 권모술수와 오심으로 얼룩진 러시아 올림픽은 순수한 감동을 주기보다는 분노를 주기에 가까웠다. 사진작가들의 만행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짓밟은 파렴치한 사람들이다. 차라리 그 목적이 돈에 있었다면 사진작가들은 '작가'가 아닌 '파파라치'이어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파파라치들은 최소한 자연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모든 사진작가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이런 사건이 기사로 뜰 정도라면 사진작가들 중 '일부'가 아닌 '대다수'의 작가들이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사진의 아름다움은 기다림과 인내가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 사진은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의 한 부분을 옮겨오는 '수단'일뿐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 아름다움을 옮겨 온 사진 중 가장 대표적인 사진 중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2년 동안 기다린 사진'을 꼽을 수 있다. 프랑스의 아무추어 사진작가 루크 페롯은 구름 한 점 없는, 바람이 불지 않는 그 단 한 번의 순간을 위해 자그마치 2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은 '올해의 천문사진-지구 및 우주부분 특별상'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하나의 '작품'이자 '예술'이었으며 '문학'이었다. 진정 사진작가들이 '아름다움' 사진을 찍기 위한다면 그들은 '아름다움'을 지킬 줄 아는 아름다운 한 명의 인간이어야한다.

 

   
 

최영수 칼럼니스트  fpwhem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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